<슈독> 당신이 알아야 할 나이키의 역사, 필 나이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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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슈독> 당신이 알아야 할 나이키의 역사, 필 나이트 이야기

by 환희의찬가 2022.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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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창업자 필 바우어만 코치

1957년 육상 선수였던 필 나이트는 오리곤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코치 빌 바우어만을 만납니다. 
이 두 사람은 공통 관심사가 있었는데 바로 운동화입니다
당시 미국의 운동화 시장은 독일에서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64년 1월 25일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은 각각 500달러를 투자하여 회사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블루리본 스포츠, 나이키의 전신입니다. 

공동창업자 필 나이트

이들은 일본에 있던 오니츠카 신발 200켤레를 들여와서 미국 내에서 팔아먹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얻은 수익으로 다시 신발을 사서 파는 방식으로 규모를 키워 갔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노력하다 보니 해마다 매출이 증가했고 1969년에는 3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게 됩니다. 

블루리본 스포츠 초창기 광고

잘 나가던 블루 리본 스포츠에 문제가 생깁니다.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와 블루리본 스포츠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고 1971년부터 오니츠카 타이거가 신발을 더 이상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창업주였던 필 나이트는 궁여지책으로 전략을 바꾸어 자체적으로 신발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 회사의 이름도 바꾸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이키(NIKE) 입니다. 
모든 분들이 한번 즈음은 들어 보신 것처럼 나이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영어식 발음입니다.   
필 나이트는 나이키의 로고 디자인을 위해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원생 캐롤린 데이비슨을 만납니다. 
필 나이트는 단순하고 부드럽고 동적인 느낌이 전달되지만 아디다스와는 전혀 다른 로고를 원했습니다. 
의뢰를 받은 캐롤린 데이비스는 육상 트랙의 코너를 생각하더니 지금의 스우시 로고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로고가 단돈 35달러에 만들어집니다. 

처음부터 정해진 단가는 아니었고 시급 2달러로 계산했는데 17시간 30분의 제작 시간을 고려하여 35달러가 됩니다. 

나이키 로고 변천사

필 나이트가 완성된 로고를 보더니 별로지만 보면 볼수록 좋아질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아무래도 칭찬이겠죠?)
그렇게 블루리본 스포츠는 나이키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후 나이키가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가 되면서 필 나이트는 캐롤린 데이비슨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나이키 로고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와 나이키 주식 500주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동 창업주 빌바오만이 와플 굽는 기계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무 스파이크가 떠올랐습니다.
이것은 운동화 밑창에 부착해 미끄럼을 방지하는 데 탁월했는데 가벼우면서도 마찰력이 강해 운동화의 기능을 상당히 높였습니다. 
빌바오마는 와플 기계에서 모티브를 얻었기 때문에 이 기술을 와플 솔이라고 불렀습니다. 
1972년 와플 솔 기술로 신발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나이키 최초의 운동화 바로 코르테즈입니다. 

나이키 코르테즈. 여전히 인기 상품입니다.

빌 바우어만은 코르테즈를 스폰할 육상 선수를 찾았습니다. 
자신의 제자이자 당시 장거리 육상 7 종목에서 미국 신기록을 가지고 있던 스티브 프리폰테인에게 후원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프리폰테인(1951년-1975년)의 너무나 짧고 극적인 선수 인생을 그린 전기영화 위다웃 리밋(Without limit)가 있는데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입니다. 예측을 불허하는 달리기 주법과 괴짜 같은 기행으로 최고의 스타였던 그는 1975년 24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육상계의 제임스 딘 이라고도 불립니다. 

나이키 최초의 후원선수, 스티브 프리폰테인

이로써 나이키 최초의 스타 마케팅이 시작되었고 더 많은 선수들에게 후원하게 됩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신기록을 세우는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아주 큰 홍보 효과가 됩니다. 
1979년에는 미국 항공우주국의 직원이던 프랭크 루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는데, 단단한 주머니에 압축 공기를 주입하여 외부 압력에도 원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기술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이키의 핵심 기술인 에어 쿠셔닝 기술 입니다. 

이 기술로 나이키 최초의 마라톤화 테일 윈드가 탄생합니다. (현재의 에어 테일 윈드)

에어 테일 윈드

1970년대 미국의 조깅 열풍이 불어옵니다. 
당시 스포츠 브랜드 선두 주자였던 아디다스는 이를 대수롭게 여겼는데 이와 달리 나이키는 운동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대중의 호응을 받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내 아디다스를 앞지르고 스포츠 브랜드의 선두 주자가 됩니다. 

당시 나이키의 비전이 '무찌르자 아디다스'였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고 실제 이 비전을 실현한 것입니다. 


1982년에는 에어쿠셔닝 기술이 담긴 최초의 농구화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명작 중에 명작 에어포스 원 입니다. 

이 에어포스 원은 농구에 맞는 기능성 상품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스트리트 패션의 대명사 특히 힙합 패션에 큰 혁명을 가져오면서 지금까지 아주 오랜 기간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요즘 정말 비싸네요.)

나이키 클래식의 대명사 에어포스 원 신발

1980년대 중반 미국에는 에어로빅 열풍이 불어옵니다.
이때 나이키는 아줌마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것은 피트니스지 스포츠가 아니다 라면 아디다스처럼 늑장 대응을 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가벼운 피트니스화를 출시한 리복에게 선두 자리를 뺏기게 됩니다. 


이에 나이키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 신인 농구 선수와 후원 계약을 하게 됩니다. 
이 선수가 바로 6번의 우승, 6번의 파이널 MVP를 갖고 있는 농구의 신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입니다.

1985년에 마이클 조던을 위해 신발을 개발합니다.바로 에어 조던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에어 조던을 신고 화려한 플레이를 하게 되고 경기를 본 많은 사람들은 에어 조던 농구화에 열광을 하게 됩니다. 

에어 조던1의 탄생

그리고 나이키의 매출은 한 마디로 대박을 치게 되고 이후 에어 조던은 나이키 산하의 독립 브랜드로 떨어져 나왔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에어조던 시리즈가 발매되면서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마이클 조던과의 협업으로 에어조던 시리즈가 대박 난 뒤 계속해서 각 분야 스타들과 협업을 합니다. 
골프계의 황태자 타이거 우즈, 축구의 신 호나우두, 노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블랙맘바 코비 브라이언트, 킹 제임스 르브론 제임스 등 많은 스타들의 라인을 론칭했습니다. 


1988년 창업자 필 나이트는 나이키를 좀 더 널리 알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위든 앤드 케네디라는 광고회사에 광고를 의뢰하는데요. 
광고회사 대표였던 위든이 나이키 광고를 고민하던 중 한 살인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게리 길모어라 하는 살인자가 있었는데 1976년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이유 없이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사형은 10년간 집행되지 않고 있었는데요. 
게리 길모어는 총살형을 원했습니다. 결국 사형을 집행하게 되는데 사형 집행 의자에 앉은 길모어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Let's Do it"

게리 길모어의 'Let's Do it'과 나이키의 'Just Do it'


이 사형은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는데 그의 마지막 말 또한 유명해집니다. 
심지어 티셔츠도 만들어졌는데요. 광고쟁이였던 위드는 이 유명한 말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대로 쓰기는 찝찝하고 단어 하나를 바꾸는데 그것이 바로 Just Do it, 일단 해봐~입니다.

이 말은 나이와 성별 건강 상태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육체적 정신적 동기를 부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비자들로 하여금 엄청난 호응을 얻고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나이키의 핵심 가치가 됩니다.

2018년은 Just Do it이라는 카피라이팅이 만들어진 30주년이 되는 해에 나이키는 이를 기념하려고 광고 캠페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광고 모델로 등장한 인물로 인해 난리가 납니다. 
미국 사회에 논란이 되고 있던 전직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이었습니다. 
콜린 캐퍼닉은 2016년 8월 경기에서 미국의 국가가 퍼질 때 일어서기를 거부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를 표시한 것이었습니다.

콜린 캐퍼닉

이후 선수들 간에 무릎 꿇기 저항이 점차 늘어나게 되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완전 빡 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키에서 콜린 캐퍼닉을 광고 모델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캠페인 카피라이팅 문구가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신념을 가져라! 모든 것을 희생할지라도~ (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
도널드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나이키를 비판했고,  SNS에는 나이키 불매 운동뿐 아니라 나이키 제품을 불태우는 영상들도 등장하게 됩니다.

CNN은 나이키가 도박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은 백인 중장년층 고객을 잃을 수는 있겠지만 미래 소비층인 젊은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 나이키의 주가가 잠시 하락하기는 하였지만 현재는 전보다 더 많은 판매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이키는 어떤 환경에도 자신만의 가치와 브랜드를 유지하며 혁신하였꼬 기업의 신념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나이키를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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