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와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생각의 감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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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

영화 컨택트와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생각의 감옥일까?'

by 환희의찬가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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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컨택트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4년 sf 영화 컨택트의 원래 제목은 Arrial(도착)입니다. 
외계인이 도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영화는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가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하면서 시작합니다. 
갑작스러운 외계인의 출연에 지구는 혼란에 빠집니다. 
지구에서는 외계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물리학자와 언어학자를 선발하여 이들과 접촉을 시도합니다. 

 

우주 외계인을 맞이한 지구인(출처: 영화 컨택트, 불교방송)


이들이 외계 비행물체 내부로 침입했을 때 7개의 다리를 가진 정체 모를 생명체와 마주칩니다.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다리에서 검은색 물질을 뿌려 어떤 문양을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문자인 겁니다. 이들이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문자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한 언어 학자가 이들과 서로의 문자를 주고받으며 드디어 이들의 문자를 해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자를 해독하자마자 이 언어 학자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외계인의 언어를 터득하자마자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열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1) 언어가 생각을 제한한다? 
언어가 생각을 제한한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언어가 생각에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언어라는 감옥에 구속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입장을 언어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언어 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예시를 듭니다. 
먼저 에스키모의 언어에 관한 것입니다. 
에스키모의 언어에는 눈을 지시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리는 눈, 바람에 휩쓸려 온 눈,  녹기 시작한 눈을 전부 다른 단어로 부릅니다. 
그래서 눈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그냥 눈을 눈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풍부합니다.

 

(2) 언어와 무지개
즉 언어의 폭이 넓어지면 생각도 풍부해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사례는 무지개 색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으로 봅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보 여섯 가지 색으로 보고 독일 사람들은 빨노파검회 다섯 가지 색으로 봅니다.

출처: Freshdoodles.com


언어마다 무지개 색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무지개를 보고도 무지개 색을 다르게 보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국어가 그어놓은 선을 따라서 세계를 본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많은 언어에서는 명사를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로 구분합니다.
다리라는 단어는 스페인어에서는 남성 명사이고 독일어에서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런데 한 연구에서 금문교 사진을 스페인 사람과 독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더니 흥미롭게도 스페인 사람들은 금문교가 장엄하다 멋있다. 
웅장하다고 표현한 반면 독일 사람들은 금문교가 아름답다 우아하다 예쁘다는 표현을 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가 생각을 제한한다는 언어 결정론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84년이라는 소설에서는 특정 단어를 없애으로써 그것에 대한 생각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예컨대 자유라는 단어를 없애버리면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하지 않게 되고 사상범죄라는 단어를 없애버리면 사상 범죄자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기 때문에 감옥의 크기를 줄여버림으로써 생각을 편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이러한 언어 결정론에 반대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언어가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언어가 없어도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가끔 어떤 생각을 떠오르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할 길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있죠. 
바로 이러한 경우가 언어가 없어도 생각을 하는 경우라는 겁니다. 
실어증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실어증에 걸린 사람이 모두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실어증 환자는 말은 못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과 생각을 할 줄 아는 능력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어가 생각의 감옥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명상이라도 할라 치면 수만 가지 상념이 들어왔다 나갑니다.

1초에도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지죠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을 우리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그냥 언어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죠. 
물론 언어가 생각을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되는 생각이 제한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언어는 생각의 감옥 vs 생각은 언어로부터 자유롭다
우리는 앞에서 두 가지 입장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하나는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생각은 언어보다 클 수 없겠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언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생각은 언어보다 클 수 있습니다. 


(4)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은 언어로부터 구속을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언어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둘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생각이 감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언어보다 클 수도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언어 자체가 곧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어의 크기와 생각의 크기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이 언어에 갇혀서가 아니라 언어와 생각이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보자 우리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는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데에는 말이 듣는 상대가 필요한 겁니다. 
상대가 없이 그냥 혼자서 씨부리는 놈을 우리는 미친 놈이라고 하죠.

그런데 사실 혼잣말에도 상대가 있습니다. 
그 혼잣말의 상대는 바로 나입니다. 혼잣말은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겁니다. 
혼잣말은 내가 질문하고 내가 대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것을 바로 생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한번 자신의 상태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무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무슨 말을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겁니다. 
우리가 그냥 말 없이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말하면서 듣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인 겁니다. 
언어가 곧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없이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어 없이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 없이 또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친구와 대화할 때 우리는 그 대화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집에 가스불을 잠그고 나왔는지 안 잠그고 나왔는지 골머리 생각하면서 우리는 친구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물론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냥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지 진지한 대화는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면 우리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생각 없이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언어 없이 생각할 수 없고 생각 없이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언어가 곧 생각이고 생각이 곧 언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생각이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언어보다 큰 것도 아닙니다. 
언어의 크기와 생각의 크기는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곧 생각이고 생각이 곧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예시바 대학교의 도서관입니다. 
이곳 도서관에는 칸막이도 없고 대가리 처박고 공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곳 도서관은 사람들이 마주 보도록 되어 있는데요.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래서 이 도서관은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습니다.

이들은 사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영화 컨택트에서 어느 학자는 외계인의 문자를 이해하자마자 세계를 바라보는 생각 자체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언어 자체가 바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생각을 배운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철학자 비튜겐슈타인

언어 자체가 바로 생각이라는 주장은 20세기의 위대한 언어 철학자 비트겐 시대의 주장과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가 1대 1 대응한다고 말했기 때문인데요. 
이때 말하는 세계를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라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바로 언어 자체가 바로 생각이라는 주장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5) 결론


그런데 언어와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1:1로 대응할까요?

고흐 아를의 침실

이제부터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죠 이 그림은 고흐의 아를의 침실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침실이 하나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는 여러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 대상들에게는 액자 사각형 벽 파란색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의 관계가 곧 사태입니다.

여기에는 사각형 액자 파란색 벽과 같은 사태가 있죠.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요소 명제입니다. 
여기에는 액자는 사각형이다. 벽은 파라타와 같은 요소 명제가 대응합니다. 
사태들을 연결하면 사실이 됩니다. 여기에는 벽에 걸린 액자와 같은 사실이 있죠. 
이러한 사실에 대응하는 것이 복합 명제입니다.

여기에는 사각형 액자가 파란색 벽에 걸려있다와 같은 복합 명제가 대응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의 총체가 바로 세계인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언어인 겁니다. 
그래서 언어가 세계를 그림처럼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를의 침실이라는 세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침실에는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파란색 벽에 다섯 개의 사각형 액자가 걸려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의자가 있고 하나의 창문이 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이 문장으로 다 설명이 된 것 같나요?
아니죠.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이 그림이 가진 아름다움입니다!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언어로 설명되는 게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언어 이상의 것입니다. 
즉 아름다움은 생각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라고 말했죠. 


비트겐슈타인의 두 개의 핵심 주장은 이겁니다. 
언어와 세계는 1대 1 대응한다. 그리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와 생각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흐의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과 같은 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언어의 세계 생각의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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