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디트리히 본회퍼
물론입니다. 아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디트리히 본회퍼”를 주제로 한 블로그 글입니다. 신학자, 저항가, 윤리사상가로서의 본회퍼와 더불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중심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신학자 그 이상의 사람
잘 알려지지 않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놀라운 이야기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그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이자 히틀러 정권에 맞선 기독교 저항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Nachfolge), 『옥중서간』(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등 깊이 있는 저서로도 유명한 그는, 순교자이자 실천적 신앙의 모델로 추앙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본회퍼’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다섯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그의 첫 번째 관심은 신학이 아닌 ‘음악’이었다
본회퍼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피아노에 능했고,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던 꿈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음악 전공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슈만과 브람스를 즐겨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중에 신학자가 되었을 때에도 예배 음악과 찬송가의 신학적 의미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2. 그는 미국 유학 중에 '흑인 교회'에서 신앙을 다시 만났다
1930년 뉴욕 유학 당시 본회퍼는 하버드나 유럽 엘리트 교회가 아닌, 할렘의 흑인 교회에서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종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살아 있는 신앙을 접하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신학이 너무 관념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행동하는 신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3. 그는 '스파이'였다
나치 체제에 반대하던 본회퍼는 단순한 신학자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군정보본부(아브베어)에 스파이로 위장 취업한 뒤, 해외 교회 네트워크를 활용해 반나치 정보를 전달하고, 유대인 탈출을 도왔습니다.
그는 단순히 저항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실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인물이었습니다.
4. 그는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순교했다
본회퍼는 수용소 수감 중이던 1943년,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Maria von Wedemeyer)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앙과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의 편지에는 감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따뜻한 인간애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고, 본회퍼는 사형 선고 후 2주 만에 교수형을 당합니다.
5.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였다
1945년 4월 9일, 그는 나치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옆에 있던 영국군 포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Dies ist das Ende – für mich der Beginn des Lebens.”
“이것은 끝이 아니라,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닌 신앙의 완성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삶과 사상은 이후 수많은 신학자와 윤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 마무리하며
디트리히 본회퍼는 단순히 고결한 신학자나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 정의의 편에 선 실천가, 사랑하는 이를 끝까지 걱정한 인간, 그리고 희망을 믿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가, 행동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 되묻게 됩니다.